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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일부 국민의힘 인사들에 내는 퀴즈

오주한

방연‧조괄‧이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 현신에겐 9개월 뒤 체험권 증정

 

바본 줄 알았더니 정말 바보였던 방연

 

여기 네 명의 ‘애송이’가 있다. 방연(龐涓‧생몰연도 ?~기원전 342), 조괄(趙括‧?~기원전 262), 이신(李信‧?~?), 곽거병(霍去病‧기원전 140~기원전 117). 넷의 공통점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권력정점에 올랐다는 것이다. 허나 이들의 운명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방연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다. 동문 손빈(孫臏) 등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에게서 수학(修學)한 방연은 정도(正道) 아닌 사도(邪道)의 배움을 추구했다. 그는 더더욱 스승 가르침 습득에 정진(精進)하는 자세로 자신보다 뛰어난 손빈을 극복하는 대신, 정적(政敵)에게 위해(危害)를 가해 이름 떨치려 했다.

 

방연은 출사(出仕) 10년만에 위나라 대장군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그는 외국인으로서 자신을 찾아온 손빈을 제(齊)나라 간첩으로 몰아 극형(極刑) 받게끔 했다. 무릎 슬개골을 파내는 빈형(臏刑), 발뒤꿈치 아킬레스건을 끊는 월형(刖刑), 얼굴에 먹물로 죄명을 새겨 넣는 자자형(刺字刑)에 처해진 손빈은 폐인이 됐다.

 

방연은 “내가 임금께 잘 말씀드린 덕에 이 정도 형벌로 끝난 것”이라 짐짓 손빈을 위로하며 그를 바보취급했다. 하지만 손빈은 모든 게 방연의 흉계(凶計)임을 알고 있었다.

 

손빈은 위나라를 벗어나기 위해선 우선 방연을 안심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손빈은 “나는 방연의 종복(從僕)”이라는 점 어필을 위해 손자병법서(孫子兵法書)를 대신 필사(筆寫)했다. 이후엔 아예 미친 척 하고서 돼지우리로 기어들어갔다.

 

방연은 “저놈이 완전히 맛이 갔구나” 생각하며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 그러나 그 때 이미 손빈은 제나라와 정말로 물밑접촉 중이었다. 어느날 위나라를 방문한 제나라 사신은 그 길로 손빈을 마차에 실어 본국(本國)으로 야반도주(夜半逃走)했다. 방연은 아차 했지만 “폐인에다 미친놈이 해봤자 뭘 하겠나”며 대수롭잖게 여겼다.

 

현자(賢者)를 해치고 배움에 소홀했던 방연은 끝내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치렀다. 손빈 도주 후 방연은 왕명(王命) 받들어 조(趙)나라를 쳤다. 조나라 구원요청을 받은 제나라는 전기(田忌)를 대장, 손빈을 참모 삼아 출병(出兵)했다. 걸을 수 없는 손빈은 수레에 앉아 호령했다. 방연과 달랐던 전기는 손빈의 방책(方策)들을 적극 수용했다.

 

손빈은 조나라로 향하는 대신 위나라로 들어가는 위위구조(圍魏救趙)를 펼쳤다. 졸지에 임금이 사로잡히고 본국이 망할 처지가 되자 방연은 급히 회군(回軍)했다. 그러자 손빈은 짐짓 달아나는 척 했다. 동시에 야영(野營)하며 병사들 밥 지어 먹는 아궁이를 첫 날엔 10만명 분, 둘째 날엔 5만명 분, 셋째 날엔 3만명 분 순으로 줄였다.

 

과거 원한(怨恨)을 갚으려는 듯 방연을 바보취급하는 것이었지만 놀랍게도 방연은 정말 바보였다. 줄어드는 아궁이를 본 방연은 전후사정 알아보지도 않고 “제군(齊軍)에서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구나” 속단(速斷)했다. 상식적으로 제나라 병사들이 달아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자신감 충만해진 방연은 전군(全軍) 통솔자라는 본분(本分)마저 잊고 앞장서서 손빈을 추격했다.

 

그렇게 밤낮없이 신나게 달리던 방연은 어떤 계곡에 들어섰다. 달빛에 의지해 길을 가던 방연은 웬 고목(古木)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걸 봤다. 궁금해진 방연은 횃불로 비추고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이 나무 뿌리가 방연의 무덤이다”였다.

 

그제야 혼비백산(魂飛魄散)한 방연 머리 위로 별빛을 가리는 화살비가 쏟아졌다. 방연은 “내 끝내 그 자식이 천하에 이름 휘날리게 만들어줬구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바보‧졸장의 대명사 방연과 달리 손빈은 손빈병법(孫臏兵法) 저자, 손방투지(孫龐鬪智) 고사 주인공으로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다.

 

호기롭게 고슴도치 된 조괄

 

조괄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名將) 조사(趙奢)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많은 병서(兵書)를 섭렵한 그는 마치 방연처럼 늘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심지어 부친과의 모의전투 때는 왕왕 이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럴수록 조괄의 자신감은 자만(自慢)으로 변해갔다.

 

조괄의 모친(母親)은 “우리 집안에 대를 이어 명장이 났다”고 기뻐했지만, 숱한 실전 겪으며 ‘전장(戰場)의 안개’의 위험성, 즉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중요성을 알던 조사는 근심했다. 조사는 “만약 임금께서 우리 아들을 (밑바닥 경험 없이) 곧바로 대장으로 삼으려 한다면 극구 말리시오”라고 부인에게 신신당부했다.

 

일은 조사 사후(死後) 기어이 벌어졌다. 당시 조나라는 서부의 강자 진(秦)나라와 큰 전쟁을 벌였다. 진장(秦將) 왕흘(王訖)은 조나라를 들이쳤지만 백전노장(百戰老將) 염파(廉頗)의 벽을 넘지 못했다.

 

강력한 진나라와 정면대결한다면 승패를 짐작할 수 없고, 이긴다 해도 상처 입은 사자 꼴이 돼 각지 제후국(諸侯國)들 먹잇감이 될 게 뻔했다. 때문에 염파는 철통방어에 임하다가 멀리 원정 온 진군(秦軍)이 군량‧사기가 다해 퇴각하면 추격‧섬멸한다는 방침이었다. 왕흘은 어떻게든 염파의 인해방벽(人海防壁)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려 했으나 번번이 쫓겨났다.

 

이에 진 승상(丞相) 범수(范睢)는 꾀를 내 “염파가 겁먹고 싸울 생각을 않는다. 반면 용맹한 조괄은 다르다”는 소문을 조나라에 퍼뜨렸다. 기록에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괄의 성품으로 볼 때 그도 기다렸다는 듯 “제게 맡겨만 주십쇼” “염장군께선 집에서 손주나 돌보십쇼” 떠벌렸을 가능성이 크다.

 

조괄의 드높은 콧대를 본 효성왕(孝成王)도 덩달아 용기백배(勇氣百倍)하며 기어이 염파를 내쳤다. 조괄의 모친, 승상 인상여(藺相如) 등이 입 모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조괄의 모친은 “정 제 아들을 대장으로 삼으시려거든 괄이가 패하더라도 그 아이의 어미‧형제에겐 죄를 연좌(連坐)치 말아 달라”고 임금에게 호소할 정도로 아들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했다.

 

전선(戰線)에 도착한 더벅머리 조괄은 “남자라면 자고로 나가 싸워야지 창피하게 숨어서 이게 뭐냐” 혀를 차며 대선배의 진세(陣勢)를 모조리 뜯어고쳤다. 그리고는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외치며 병사들 몰아 호기롭게 달려 나갔다. 그에게서 대선배의 노하우를 배우려는 자세 따위는 없었다.

 

조괄 무리가 몰려나오자 진장 백기(白起)는 돌연 퇴각하기 시작했다. “저것 봐라. 이렇게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을” “역시 난 천재야” 나르시시즘에 빠진 조괄은 마치 방연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진군 뒤를 맹렬히 추격했다.

 

조괄이 신나게 말 궁둥이를 불나도록 갈기던 그 때 사방에서 돌연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진나라 복병(伏兵)이 쏟아졌다. 불리한 지형에서 기습당한 조군(趙軍)은 뿔뿔이 흩어진 채 포위됐다. 무려 약 한달 동안 인해장벽(人海障壁)에 갇힌 조군은 말(馬)고기마저 떨어지자 아군 시신까지 뜯어먹는 처참한 처지에 내몰렸다.

 

주린 배 부여잡은 조괄은 전군에 최후의 돌격을 명했으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기에 될 턱이 없었다. 조괄은 온 몸에 바람구멍 숭숭 난 채 선 채로 죽었다. 포로가 된 수십만 조군은 극소수의 어린 종자(從者)만 빼고 모조리 생매장됐다. 조나라는 염파‧이목(李牧) 등 명장들을 기용함에 따라 겨우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

 

우쭈쭈에 나라 말아먹은 이신

 

이신은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장수다. 조나라 남부 정벌, 연(燕)나라 태자 생포 등 몇몇 공을 세운 그도 역사공부와는 담 쌓은 덕인지 방연‧조괄 등 선배들 뒤를 따랐다.

 

이신은 진시황(秦始皇)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여러 나라를 집어삼키고 남부의 강자 초(楚)나라와의 결전만을 앞두게 되자 시황제는 문무백관(文武百官)을 소집했다. 노장(老將) 왕전(王翦)은 “60만 대군을 동원해야 승산이 있다”고 진단했다.

 

왕전은 조나라‧연나라 정복 등에서 숱한 전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그는 이목이 버티던 조나라에 맹공(猛攻)을 가해 일진일퇴(一進一退) 끝에, 앞서 수십년 전 조나라 병역자원 상당수가 산 채로 땅에 묻혀 죽은 영향도 있지만, 불과 약 1년만에 무너뜨렸다. 협객(俠客) 형가(荊軻)를 보내 시황제를 암살하려 한 연나라도 천리 밖 요동(遼東) 원정이라는 리스크마저 극복한 채 기어이 정복했다.

 

이러한 백전노장의 의견이 나오기 무섭게 이신은 반박에 나섰다. 이신은 왕전 보란 듯 “20만이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주장했다. 시황제는 “왕전 그대도 나이가 들더니 소심(小心)해졌소” 면박 주며 이신의 전략을 택했다. 왕전은 칭병(稱病)하고서 사표 냈다.

 

이신은 부장 몽염(蒙恬)과 함께 어디 마트에 쇼핑이라도 가듯 신나게 칼춤 추며 초나라로 기어들어갔다. 초반에는 초군(楚軍)을 격파하는 등 연전연승(連戰連勝)했으나 이는 이신의 자만심을 키우려는 초나라 측 교병지계(驕兵之計)였다.

 

전투가 어떤 형태로 진행됐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이신은 초나라 명장이자 항우(項羽)의 조부(祖父)인 항연(項燕)에게 대패했다. 몇 번 사소하게 이겼다 하더라도 한 싸움에 본대(本隊)가 격파당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도리어 승세(勝勢) 탄 초군이 역습(逆襲) 가한다면 천하를 통일하는 건 진나라가 아닌 초나라가 될 수 있었다.

 

“망했다” 외친 시황제는 부리나케 몸소 왕전의 집으로 달려가 “과인(寡人)이 잘못했소” 달래며 복직(復職)을 호소했다. 어쩔 수 없는 척 따라나선 왕전은 “60만 병력이 아니면 안 될 줄 아옵니다” 재차 아뢰었다. “아무렴 장군 말씀이 맞고 말고” 고개 끄덕인 시황제는 전군을 왕전에게 맡긴다는 의미의 병부(兵符)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여했다.

 

왕전이 60만 대군을 요구한 배경엔 물량전(物量戰‧Material War)으로 변한 진초(秦楚)대치 당시의 전쟁속성(屬性)이 있었다.

 

산출량(産出量)에 한계가 있는 청동기(靑銅器)의 춘추시대(春秋時代) 때는 전차(戰車) 탄 소수귀족이 전장의 중핵(中核)이었다. 전쟁형태도 “귀족은 같은 귀족을 죽이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우리가 만나 정정당당히 승부 겨룬 뒤 패한 측은 패자(霸者)에게 말끔히 복종한다”는 식이었다.

 

반면 산출량이 무제한에 가까운 철기(鐵器)의 전국시대 때는 국력(國力)이 뒷받침되는 한 일반백성을 무한정 무장시킬 수 있었다. 들판을 가득 메운 장정(壯丁)들 머릿수만큼, 춘추시대처럼 스포츠 같은 단판싸움으로는 상대를 굴복시키기 어려웠다. 게다가 “내가 이겼으니 말 잘 들어” 풀어준 적국 귀족은 “내가 이렇게 군사 많은데 왜” 그 즉시 뒤통수치기 일쑤였다. 이에 전쟁형태도 제압이 아닌 흡수를 위한 섬멸전(殲滅戰)으로 변했다.

 

이러한 기조는 여러 나라가 강대국에 흡수되고 진‧초 두 나라만 남은 전국시대 말기에 절정(絕頂) 이뤘다. 때문에 왕전은 마찬가지로 물량전으로 나올 게 뻔한 초나라에 맞서 소모전(消耗戰)을 치러, 초나라를 마지막 육수 한 방울까지 완벽히 흡수해야만 승리가 담보된다고 본 것이었다. 양 측 국력, 지휘관 역량, 장졸(將卒) 무장‧훈련도 등이 엇비슷하다면 머릿수 많은 쪽, 즉 마지막까지 싸울 병사가 남는 쪽이 이기는 게 상식이다.

 

평생 전장을 누빈 노장과 몇 번 승리에 도취된 애송이의 차이는, 두 말 해봤자 잔소리지만 컸다. 왕전‧항연 두 명장은 통일대업(統一大業) 걸린 건곤일척(乾坤一擲)‧용호상박(龍虎相搏)의 대결을 펼쳤다. 최후의 승자는 왕전이었다. 크게 깨달은 이신은 다시금 유치원으로 돌아가 기초부터 익히며 성장해 훗날 비로소 명장으로 거듭났다.

 

‘대장군 폭행사건’ 분개한 곽거병

 

곽거병은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청년장수다. 그도 어린 나이에 대군 통솔자가 됐지만 방연‧조괄‧이신과의 차이점이 있었다. 바로 ‘대선배로부터 배우려는 자세’였다.

 

곽거병은 곽중유(霍仲孺)라는 하급관리의 사생아였다. 그는 생부(生父) 얼굴도 모른 채 편모슬하(偏母膝下)로 저잣거리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이모가 무제의 후궁이 되면서 졸지에 외척(外戚)이 돼 황궁(皇宮)에 들어갔다.

 

곽거병은 어려서부터 궁술(弓術)‧기마술(騎馬術) 등에 뛰어났다. 이 신예(新銳)를 눈여겨 본 무제는 대장군 위청(衛靑)과 함께 북방 흉노(匈奴) 토벌에 투입했다. 곽거병은 기병대 이끌고서 전선을 지나 초원 속 깊숙이 들어간 뒤, 선우(單于‧흉노황제) 일가친척을 죽이고 사로잡거나 최대 목축지(牧畜地)를 점령하는 큰 공을 세웠다. 직위는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이르렀다.

 

자연히 콧대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위청을 떠나 곽거병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곽거병 자신도 언행(言行)에 거침이 없었다. 허나 곽거병은, 물론 아랫사람들도 잘 대했지만, 윗사람 앞에선 겸손 또 겸손했다. 기록에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는 위청의 자리를 빼앗으려 발버둥치는 대신, 낮은 자세로 위청 등으로부터 용병술(用兵術) 등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한 하급장교의 대장군 폭행사건이었다. 비장군(飛將軍)으로 이름 떨치던 맹장 이광(李廣)이 어느날 위청과의 갈등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이광의 아들 이감(李敢)은 “위청 때문에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다” 분해하며 ‘대장군’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팼다.

 

평소 덕망(德望) 높았던 위청은 여기저기 빨간약 바르고 밴드 붙이면서도 이를 불문(不問)에 부쳤지만, 이 소식 들은 곽거병은 “감히 대장군을” 외치며 이감을 사냥터에서 활로 쏴 죽여버렸다. 만약 곽거병이 조금이라도 현자이자 대선배를 시기‧질투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오히려 속으로 쾌재 불렀을 터였다.

 

2023년 7월 대한민국 정치권의 방연‧조괄‧이신 등의 행태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당 윤리위로부터 징계받자 당내 방연‧조괄‧이신 등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치 이렇게 될 걸 미리 알았다는 듯 가벼운 입을 놀리고 있다. 허나 필자가 앞서 칼럼에서 썼듯, 그리고 손빈‧염파‧왕전 등의 역사(歷史)가 보여주듯 간세지배(奸細之輩)들의 박수소리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일 따름이다. 9개월 뒤 나무 아래 문자 읽을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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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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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소유

    오늘도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 풀소유
    오주한
    작성자
    2023.07.28
    @풀소유 님에게 보내는 답글

    역사는 정말 인간학의 보고인 듯합니다. 저도 글 쓰면서 많은 것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