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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홍준표 징계, 전화위복 될까

오주한

정적과 동고(同苦)하다가 책임 덮어쓴 도모유키

중이는 오패위업…洪, 총선책임 해방돼 승자되나

 

“예스카 노카” 포효한 말레이의 호랑이

 

예나 지금이나 잘못은 A가 했는데 책임은 B가 덮어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처럼 책임전가(轉嫁)에서 논리 따위는 필요 없다. 오로지 ‘안면몰수’ ‘억지’ ‘떼쓰기’만 있으면 된다. B로서는 눈 뜨고 당하기 십상이다. 허나 A가 제 손으로 B의 권한을 사전(事前)에 축소시켜버린다면, 다시 말해 B가 조직실패를 책임질 여지(餘地)의 싹을 잘라버린다면, B로서는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장성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생몰연도 1885~1946)는 일본군 실세(實勢)이자 ‘자칭 작전의 신(神)’ 츠지 마사노부(辻政信‧1902~1968?)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피를 본 인물 중 하나다.

 

‘말레이(Malay)의 호랑이’ 도모유키는, 일제(日帝)의 한반도 식민지배 패악과는 별개로 순수히 그 개인의 군사적 재능만 봤을 때, 일본군 장성으로선 보기 드물게 유능한 군인이었다. 호리 에이조(堀栄三) 등 유능한 참모들도 도모유키를 보좌했다. 에이조는 반자이(萬歲‧자살)돌격을 엄금(嚴禁)한 개념인이었다.

 

중일(中日)전쟁을 치르던 일제는 미국의 대일(對日) 석유 금수(禁輸)조치 등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엄청난 양의 연료가 필요했던 일제는 막대한 천연자원이 기다리는 동남아시아를 주목했다. 문제는 이곳이 미국‧대영제국 등 영향권 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제는 1941년 12월7일 미 하와이 진주만(Pearl Harbor)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제 해군이 진주만의 미 해군함대를 맹폭(猛爆)하는 사이, 육군‧해군육전대(海軍陸戰隊‧해병대)는 1941년 12월8일~1942년 2월15일 남방작전(南方作戰)이라는 이름으로 동남아 접수에 나섰다.

 

도모유키는 남방작전 당시 25군 사령관으로서 아서 퍼시벌(Arthur Percival‧1887~1966)의 영국군이 기다리는 싱가포르로 출병(出兵)했다. 여느 졸장이라면 병력이 많을수록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도모유키는 싱가포르 현지 보급사정 등을 감안해 대본영(大本營)이 제안한 병력보다 훨씬 적은 휘하만 이끌고 전선(戰線)으로 향했다. 퍼시벌 측은 약 10만 대군(大軍)이었던 반면 도모유키 측은 약 3만에 불과했다.

 

장병 머릿수는 줄어든 반면 그만큼 기동력이 확보됐다. 도모유키는 기갑부대를 앞세워 쾌속진격했다. 영국군은 “정글에서 전차(戰車)는 무용지물”이라 여기고서 기갑전력 확보에 소홀했던 터라 화력(火力)에서 크게 밀렸다.

 

도모유키는 말레이반도를 광속으로 통과했다. 25군 공병(工兵)들은 교각(橋閣)을 부설(敷設)하는 대신 그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부교(浮橋)를 떠받치는 ‘인간다리’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보병들은 신속히 진군(進軍)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기존 교량(橋梁)을 폭파해 일본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은륜(銀輪)부대라는, 수풀 사이를 손쉽게 지나다닐 수 있는 일본 측 ‘자전거부대’ 출몰로 번번이 실패했다.

 

일본군 병사들은 자신이 먹을 군량(軍糧)을 각자가 소지하고서 반합(飯盒)에 신속히 밥 지어 먹은 뒤 걸으면서 소화했다. 밥이 모자란다 싶으면 영국군이 달아나면서 버린 산더미 같은 쌀을 챙겼다. 상당수 식수원(食水原)도 일본군 차지가 됐다.

 

영국군은 앞서 말레이해전(海戰) 등에서 제공권(制空權)‧제해권(制海權)을 대부분 상실했기에 효과적인 공중폭격‧함포사격 지원도 바랄 수 없었다. 해당 해전에서는 대영제국의 자존심 ‘프린스 오브 웨일즈(HMS Prince of Wales)’ 등 동양함대(Eastern Fleet)도 치명타를 입었다. 전통적 해상강국이었던 영국에게 말레이해전 패배는 큰 충격이었다.

 

도모유키가 싱가포르에 입성(入城)하자 영국군은 시가전(市街戰)에 돌입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도모유키는 엉뚱한 방향으로 공격하는 척 해 영국군 상당수를 그 쪽으로 돌린 뒤, 전혀 반대 방향에서 뭍에 오르는 성동격서(聲東擊西)로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휘하가 여기저기 분산된 채 각개격파(各個擊破) 당하던 퍼시벌은 결국 싱가포르를 무방비도시(Open City)로 선언하고서 항복협상에 나섰다.

 

협상장에서 도모유키가 호통치며 했다는 “예스카, 노카(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항복할거야 말거야)”는 유명하다. 퍼시벌은 호주군 등을 포함한 영국군에 대한 인간적 대우 등 지극히 원론(原論)적 조건만 제시한 채 백기 들었다. 수만명의 영국군은 일본군 포로가 됐다.

 

‘패전의 신’ ‘책임전가의 신’

 

그런데 싱가포르전투 당시 도모유키 휘하에는 한 명의 돌아이가 있었다. 바로 마사노부였다. 마사노부는 직책은 참모였지만 도모유키마저도 쉽게 제어할 수 없는 ‘든든한 백’을 자랑했다. 게다가 인성(人性)은 더 이상 나빠질 게 없을 정도로 개차반이었다.

 

‘자칭 작전의 신’ 마사노부는 육군 유년(幼年)사관학교 수석졸업, 육군사관학교 수석졸업 등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그는 보병소위 임관(任官) 전에 이미 다이쇼천황(大正天皇)으로부터 은시계를 배령(拜領)받을 정도로 조야(朝野)의 기대를 한 몸 가득 모았다.

 

육군대학교도 3등으로 수료한 마사노부는 이번에도 쇼와천황(昭和天皇)에게서 군도(軍刀)를 하사받았다. 대본영 참모본부 1과(총무과) 근무 시절에는 후일 내각총리대신이라 쓰고 20세기판 쇼군(將軍)이라 읽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당시 대좌(大佐‧대령)와도 연을 맺었다. 마사노부도 히데키를 따라 군부(軍部) 내 입헌군주(立憲君主) 파벌인 통제파(統制派)에 속했다. 마사노부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정작 실전(實戰)에 투입된 마사노부는 전형적인 ‘헛똑똑이’ ‘문제아’였다. 관동군(關東軍) 복무 시절 그는 1939년 할힌골(Khalkhin Gol)전투에 참전(參戰)했다. 당시 관동군은 군공(軍功)을 세우기 위해 소련과의 전면전(全面戰)을 계획했다. 이에 대본영은 공격중지 명령을 전보(電報)로 하달했지만 관동군 작전참모 마사노부는 이를 묵살했다. 또 대본영에 보낸 공격속행 전보 내 ‘사령관‧참모장 결재란’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관동군이 상대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는 후일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전투에서 막강한 나치독일 국방군(Wehrmacht)을 격파하게 되는 명장(名將)이었다. 자연히 마사노부 따위는 초전박살났다.

 

승리 후 주코프는 “일본군은 사병‧부사관‧초급장교들은 쓸 만하나 고급장교들은 무능하다”고 평한 것으로 알려진다. 허나 자칭 작전의 신은 “나의 계획은 매우 훌륭했으나 일선(一線) 지휘관들 무능으로 패했다”고 자평(自評)했다. 실제로도 숱한 장교들에게 할복(割腹)을 명했다. 정작 주코프가 지목한 패전(敗戰) 최고책임자는 월권(越權) 일삼고 작전 설계한 마사노부 그 자신이었다. 그의 궤변에 혀를 내두른 대본영은 통제파 반발을 무릅쓰고 마사노부를 한직(閑職)으로 좌천(左遷)시켜버렸다.

 

그래도 마사노부는 정신 못 차렸다. 든든한 백 업고 기어이 요직(要職)에 복귀한 그는 싱가포르에서도 “이 구역의 미친놈은 나야” 외치며 폭주(暴走)했다. 마사노부는 작전참모라는 본분(本分) 잊고 적 전차를 탈취해 앞장서서 돌격하는 기행(奇行)을 선보였다. 이따위 짓거리를 본 도모유키는 “화장실 인분(人糞) 치우는 넉가래 같은 자다”며 식은땀 흘렸다.

 

일부러 하는 일마다 전부 실패하기도 힘든데 마사노부는 이 분야의 진정한 본좌(本座)였다. “별동대(別動隊)를 태국군으로 변장시켜 싱가포르 시내까지 단숨에 돌파한다”는 내용으로 야심차게 착수한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다.

 

무능한 주제에 피(血)에는 환장했다. 싱가포르를 함락한 일본군은 화교(華僑) 수십만명을 불심검문한 뒤, 항일(抗日)분자라고 자의적으로 판단되는 6000여명을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중립국 스페인 영사관 직원 수십명도 대검(大劍)에 찔려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전후(戰後) 도쿄재판(東京裁判‧극동국제군사재판)에 출석한 이들 대다수는 이 학살이 마사노부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증언했다. 마사노부는 또 명령서를 위조해 미군 포로들 처형을 명했다가 미수(未遂)에 그치기도 했다.

 

허나 할힌골전투 때처럼 이번에도 마사노부의 만행 책임은 타인(他人)이 떠안았다. 태평양전쟁이 일제 패망으로 끝나자 마사노부는 태국 방콕으로 잽싸게 튀어 실종된 상태였다. 때문에 교수대(絞首臺)에는 전제군주(專制君主)파인 황도파(皇道派) 소속 도모유키 등 엄한 사람들이 올랐다. 도모유키는 저 희대의 돌아이‧돌머리와 달리 “내 목숨 하나로 부하들 모두 살릴 수 있다면 희생하겠다”고 말했다.

 

마사노부는 도모유키 등이 모두 처형되고 자신의 전범(戰犯) 공소시효(公訴時效)가 풀린 1950년에야 태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허구로 점철된 자서전(自敍傳)으로 떼돈 벌고 중의원(衆議院) 의원까지 당선된 그는 1961년 베트남 호치민에서 실종될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총선 책임서 해방된 洪…그 반사이익 수취 여지는↑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홍준표 대구시장에 대한 당원권 정지 10개월 징계를 최근 의결(議決)했다. 공교롭게도 이로 인해 홍 시장은 내년 총선 무렵(2024년 4월) 때까지 당내 활동에 일정부분 제약(制約)이 가해지게 됐다. 때문에 일각에선 당 지도부가 대구‧경북(TK) 공천(公薦)에서의 홍 시장 영향력 행사 가능성을 사전차단하기 위해 이같은 정략적 조치를 취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허나 어쩌면 이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레 나온다. 거대양당 지지율이 도토리 키 재기인 가운데(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내년 총선에서의 여야 대결 결과가 어찌될지는 불분명하다. 만에 하나 총선 과반 압승(壓勝)이라는 현 지도부 주장과 달리 저조한 성적이 나오게 된다면, 책임 덮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이 점에서 홍 시장은 책임전가 ‘제물(祭物)’이 될 여지에서 자유로워질 소지가 있다. 제 손으로 홍 시장을 징계해 당내 영향력을 억누르려 해놓고 “총선 패배는 당신 책임”이라 하긴, 마사노부 같은 안면몰수라면 또 다르겠지만, 어렵기 때문이다.

 

어차피 당심(黨心)은 내년 총선 결과에 따라 변할 가능성이 크다. 홍 시장 징계라는 자충수(自充手)를 둔 지금의 당 실세들이 내년 총선 결과 책임을 지게 된다면, 당심은 그들을 대신할 대안(代案)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그 대안은 체급 면에서 당내 누구보다 월등(越等)한 홍 시장이 될 수밖에 없다.

 

제갈량(諸葛亮)과 유기(劉琦)의 대화에서도 나오듯, 신생(申生)은 세력 안에 있다가 화를 입었지만, 중이(重耳)는 잠시 세력 밖에 머묾에 따라 도리어 안전이 보장돼 훗날 진문공(晉文公)에 등극할 수 있었다. 중이는 춘추오패(春秋五霸) 반열에 올라 천하를 호령했다. 역사가 보여주듯 이번 징계는 전화위복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또 그렇게 되리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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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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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dol7707

    저들은(특히 소위 '틀딱'들)솜방망이 징계라고 이의제기를 할 것 같으며, 어거지로 엮어서 추가징계를 할 자들입니다. 가히 조고나 위충현도 울고 갈 수준이죠.

    국민의힘은 이미 민심이 사형을 선고했고 저도 그랬습니다.

    https://theyouthdream.com/26393450

  • ydol7707
    오주한
    작성자
    2023.07.28
    @ydol7707 님에게 보내는 답글

    국민의힘이 반드시 정상화되리라 믿습니다.

  • 위하여
    2023.07.30

    국짐의 존폐는 2024년 4월 10일에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명석한 분석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위하여
    오주한
    작성자
    2023.07.30
    @위하여 님에게 보내는 답글

    향후 정계개편이 어찌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으로선 국민의힘은 존립시키면서 당내 몇몇 인적쇄신 또는 재창당 수준의 쇄신을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