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칼럼] 이순신정신이 중우정치인가

오주한

日‧中 관련 ‘과학‧미래지향‧反사대’ 추구한 충무공

‘묻지마‧무조건‧친중’ 논란 이재명 비견은 어불성설

 

민주당 강성파가 본다면 뒤집어질 기록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생몰연도 서기 1545~1598) 장군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 대표 위인(偉人)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등에서 수군(水軍) 등을 이끌고서 외적(外賊)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순신은 한양 건천동(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1576년 식년무과(式年武科) 병과(丙科)에 합격해 관직에 나선 그는 벼슬살이 초기엔 북방 여진족(女眞族) 침입을 방어했다. 47세 무렵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된 이순신은 왜침(倭侵)에 대비해 수병(水兵)을 조련했다. 본격적인 거북선 건조도 이 무렵 이뤄진 것으로 알려진다.

 

1592년 4월13일(이하 음력 기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침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 소식은 이순신에게도 전해졌다. 부산진(釜山鎭‧부산광역시) 등이 함락되고 앞바다에 왜선(倭船) 수백 척이 정박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기민하게 움직이는 대신 침착하게 대응했다.

 

이순신은 공격에 앞서 전황(戰況)을 면밀히 분석하고 매일 작전회의를 소집하는 한편 기동연습도 실시했다. 임전무퇴(臨戰無退)의 태세가 갖춰지자 비로소 5월2일 기함(旗艦)에 승선해 동월 4일 새벽 출진했다. 이 때 이순신함대는 전선(戰船) 24척, 협선(狹船‧대형전투함의 소형 부속선) 15척, 포작선(鮑作船‧보급선 격) 46척 등 대규모였다.

 

5월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 30여척 발견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이를 손쉽게 격파했다. 당시 왜군(倭軍)은 조선수군의 해상 방면 공격을 미처 예상치 못하고 상륙해 약탈을 벌이던 상태였다. 이순신함대를 본 왜군은 황급히 승선해 도주하려 했으나 26척이 격침되는 등 일격에 박살났다. 이순신은 첫 교전인 옥포해전(玉浦海戰)을 승전보로 장식하며 쾌조(快調)의 연승 스타트를 끊었다.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그 위용을 드러냈다. 지금까지의 학계 연구결과에 의하면 거북선은 총탄 등을 튕겨내는 완전장갑으로 유명하다. 장갑 상단에는 뾰족한 침을 수없이 박아 백병전(白兵戰)에 능한 왜군이 올라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무수한 화포(火砲)를 사격하며 적함 사이로 돌진했다. 이 처음 보는 괴물을 왜군들은 메쿠라부네(盲船‧눈 먼 배)라 억지로 폄훼하며 두려움을 떨쳐버리려 했다고 한다.

 

이후 이순신은 한산대첩(閑山大捷)‧명량대첩(鳴梁大捷) 등에서도 줄줄이 왜군 수군을 격파했다. 그는 일부러 나가 싸우는 대신 아군에 유리한 곳으로 왜군을 유인해 대승을 거두곤 했다. 만약 이순신이 왜군함대를 물리쳐 뭍의 왜군 보급로를 차단하지 않았다면, 전란(戰亂)은 가중됐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이순신 관련 기록을 보면 몇 가지 특이한 내용이 있다. 친중(親中) 논란의 현대 국내 정치권 일부는 이순신을 ‘묻지마 반일(反日)의 아이콘’ 등으로 떠받들지만, 이순신은 ‘적대적인 일본인’ ‘우호적인 일본인’을 철저히 갈라서 볼 줄 알았다는 것이다. 또 이순신은 중국에 대해서도 잘못한 것은 꾸짖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미래지향적 자세로 친한파 수용

 

1597년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은 불과 10여척 군선(軍船)의 빈약한 전력(戰力)으로 133척(또는 300여척)의 왜군을 막아야 하는 절망적인 처지에 빠졌다. 게다가 조선시대 수병들은, 뭍에서 쫓겨나 고된 물질하는 인간들이라는 오해에 더해 물귀신이 되면 시신조차 수습하기 어렵다는 현실까지 겹쳐, 천민 같은 대우를 받았기에 사기(士氣)도 바닥을 쳤다.

 

이에 이순신은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일갈(一喝)하며 군심(軍心)을 다잡았다. 이 해전(海戰)에서 이순신은 왜선 31척(또는 대부분)을 수장(水葬)시키는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둬 남해 제해권(制海權)을 탈환했다. 남‧서해 루트로 지상군에게 보급품을 수송한다던 왜군 전략은 철저한 실패로 돌아갔다.

 

이 명량해전에는 한 명의 항왜(降倭)가 등장한다. 실명은 알 수 없고 준사(俊沙)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전투에 패한 왜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직접 저술한 난중일기(亂中日記) 등에 의하면 이 때 준사는 바다에 어지러이 부려진 왜군 시신들을 살피다가 어느 하나를 가리키며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고 외쳤다. 병사들이 해당 시신을 건져내자 준사는 재차 마다시임을 확인했다. 마다시는 왜군 측 수군대장이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 준사는 다른 배도 아닌 ‘이순신 기함’에 타고서 이순신 바로 곁에 위치했다. ‘묻지마 노재팬’ ‘묻지마 혐일(嫌日)’ 등을 광(狂)적으로 신봉하는 오늘날 더불어민주당 강성파‧강성지지자들이 봤다면, 이순신마저도 대번에 ‘친일파’로 몰릴 만한 풍경이었다. 당장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 등 일본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거나 일본여행을 가는 자국인마저 ‘친일파’로 무차별 매도(罵倒)하고, 한국을 찾는 일본 내 친한파(親韓派)마저도 욕하는 게 그들이다.

 

中에 저자세인 대신 따질 건 따지다

 

이순신은 나아가 중국에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에 출병(出兵)한 명(明)나라 수군도독(都督) 진린(陳璘)은 자국에서도 거만하고 탐욕스럽기로 악명 높았다. 그의 수하들은 조선백성을 상대로 갑질을 일삼고 약탈을 자행했다. 진린은 조선관리를 폭행하고 그 목에 밧줄을 걸어 질질 끌고 다니기도 했다.

 

이순신은 때로는 이치로 꾸짖고 때로는 당근도 내밀어 진린의 조명(朝明) 연합함대 지휘권 상당수를 가져왔다. 진린은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이순신을 이야(李爺‧이씨 어르신)라 정중히 호칭했다고 한다. 지난달 초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 관저에 마치 속국(屬國) 관리처럼 ‘불려가’ 공손한 자세로 싱하이밍의 협박성 일장연설을 경청했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는 크게 대비되는 자세였다.

 

근래 민주당 강성지지층 상당수가 일본 후쿠시마(福島) 방류수(오염수) 관련 반일‧혐일 조장 의혹, 친중 의혹의 이 대표를 이순신에 ‘비견한다는’ 웃지 못 할 소식이다. 민주당 대표실 백보드에도 이순신 장군 모습이 담긴 대형현수막이 내걸렸다고 한다.

 

막무가내식 민주당과 달리 ‘과학적’ 전술로 일본을 극복하고, 묻지마 반‧혐일 대신 ‘미래지향적’ 자세로 포용할 건 포용했으며, 친중 논란 야기 대신 ‘사대주의(事大主義) 척결’에 나선 이순신 장군이 이를 본다면 뭐라 하셨을지 궁금하다. 아마 옥포해전 때의 “망령(妄靈)되게 움직이지 말고 산(山)처럼 침착하라”는 일성(一聲)이 터져 나오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20000.png.jpg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5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 INDEX
    2023.07.14

    선동에 필요한 특정인물에 기대지 않고서는 자기의견 표현이 어려운가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주체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주인의식을 잃고누군가를 우상화하기위해 발악하며 무리수를던지는 모습이 매우 안쓰럽습니다. 찢을 무슨 충무공에 비벼 ㅋㅋ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7.14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누군가를 지지하더라도 선동가에 휩쓸리는 대신 스위스용병처럼 대의를 최우선시하는 자세가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익으로 가득한 의혹 인물을 마찬가지로 사익에 눈이 멀어 밀어주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대의를 최우선시 하신 충무공께서 오래 존경받는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충무공 같은 분을 응원하는 청꿈 식구님들을 제가 존경하는 까닭입니다. 말씀하신 바 적극 공감합니다.

  • 풀소유

    작금의 사태를 이순신 장군이 보셨다면

    당장 목을 치셨을 듯합니다.

  • 풀소유
    오주한
    작성자
    2023.07.15
    @풀소유 님에게 보내는 답글

    거북선도 경기를 일으켰을 듯합니다. 통탄스러울 따름입니다.

  • 나가

    이순신이 아니라 정순신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