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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열패밀리 김여정, ‘이한영 루트’ 걷나

오주한

언중유골 끝에 조선 망명한 항왜 사아갸

金 말 속에 뼈…‘제2의 이한영’ 여부 주목

 

언중유골의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들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말이 있다. 말(또는 행동) 속에 뼈가 있다는 뜻으로 겉보기엔 예사롭지만 실은 심상찮은 메시지가 내포돼 있다는 의미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 일본이 일심단결(一心團結)해 조선을 쳤다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창칼을 앞세운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열도통일 과정에서 각지 많은 전국다이묘(戰國大名)들은 막대한 출혈에 시달렸다. 가족‧친지를 잃은 상당수 다이묘는 자연히 히데요시와 원수 중의 원수지간이었다.

 

히데요시와 대립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적잖은 다이묘는 언제 히데요시로부터 토사구팽(兔死狗烹)당할지 몰라 불안에 떨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공 배경 중에는 ‘통일 후 이제는 쓸모없고 언제 반란할지 모르는 위험분자가 된 사무라이(侍) 숙청’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히데요시는 양자(養子) 히데츠구(秀次)를 당초 후계자로 낙점했으나, 늦둥이아들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자 1595년 가차 없이 히데츠구를 할복(割腹)시켜버리기도 했다.

 

때문에 상당수 다이묘는 히데요시의 주먹 앞에 고개 조아리면서도 뒤로는 이를 갈았다. 임진왜란 때도 친(親)조선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처럼 강제차출을 거부하거나, 차출된다 해도 독안룡(獨眼龍)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처럼 힘껏 싸우는 대신 대충 하다 일찍 귀국했다. 일부는 아예 조선에 투항해버렸다. 대표적 항왜(抗倭)가 사야가(沙也可) 김충선(金忠善‧생몰연도 서기 1571~1642)이다. 사야가는 그의 일본명을 음차(音借)한 것으로 정확한 본명은 알 수 없다.

 

히데요시의 출병령(出兵令)이 떨어지자 왜군(倭軍)은 부산진(釜山鎭‧지금의 부산광역시) 앞 해안에 상륙했다.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만여 대군이 일거에 부산진을 점령하는 등 왜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상륙거점을 확보한 왜군은 보름도 안 돼 한양에 입성(入城)했다.

 

왜군의 주된 전력은 텟포(鉄砲‧철포) 즉 조총(鳥銃)부대였다. 조총은 활에 비해 연사력 등은 뒤쳐졌지만 화력(火力)에서 월등했다. 사격 시 터져 나오는 폭음은 듣는 처음 이로 하여금 혼비백산(魂飛魄散)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게다가 왜군은 연사력 확보를 위해 조총수 전열(戰列)을 3열 등으로 나눠 각 열이 번갈아가며 쏘게 했다. 앞열이 사격 후 뒤로 빠져 재장전하는 사이 뒷열이 사격하는 식으로 말이다.

 

자연히 히데요시도 여러 다이묘 중 텟포 생산‧운용을 전문으로 하는 가문을 특히 아꼈다. 사야가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은 그는 또다른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이 돼 휘하 텟포부대를 이끌고 부산진 해안가 모래를 밟았다. 많은 조선백성들은 이들을 두려움과 증오의 눈길로 바라봤다.

 

“예의지방 백성들에게 삼가 고하노라”

 

그런데 용감무쌍히 상륙한 사야가의 언행(言行)이 뭔가 이상했다. 그는 여러 왜장(倭將)들이 보는 앞에서 입으로만 일도양단(一刀兩斷)을 외칠 뿐, 휘하들에게 밥 지어 먹이고 총기를 손질하게 하는 등 전투준비에 착수하는 대신 미적거렸다.

 

도리어 효유서(曉諭書)라는 이름으로 노략질을 엄금하는 군령(軍令)을 내렸다. 불행히도 우크라이나전쟁 등 21세기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들에게 있어서 대민(對民)약탈은 사기를 올리는 주요수단 중 하나였다. 따라서 약탈금지는 곧 “나는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효유서 내용은 의미심장했다. 사야가는 “이 나라 백성은 이 글을 보고 안심하고 생업(生業)에 종사할 것이며 절대 동요치 말라. 비록 나는 타국인이고 선봉장이지만 일본을 떠날 때부터 맹세한 바 있다”고 했다. 그는 조선을 낮잡아 부르는 대신 ‘예의지방(禮儀之邦)’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 조야(朝野)는 사야가의 언중유골을 숨죽여 지켜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사야가는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박진(朴晉)에게 서찰을 보내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聖言)의 백성이 되고자 합니다”며 투항의사를 전격 내비쳤다. 그리고는 정말로 텟포수 등 수백명을 이끌고 백기를 세웠다.

 

사야가의 집안도 전국시대(戰國時代) 과정에서 히데요시에 맞서 피를 피로서 씻는 혈전(血戰)을 벌인 바 있었다. 게다가 사야가는 무인(武人)이긴 하지만 유학(儒學)에 깊이 심취해온 터였다. 그는 조선망명 후 집필한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경서(經書)를 읽었고 조선 등의 문화를 흠모했다. 살인‧약탈‧배신 등을 일삼는 일본의 비속한 풍속을 경멸했다”고 밝혔다.

 

“조선인은 왜놈이라면 무조건 미워했다”는 식의 편견과 달리 조선 조야 태도도 유연했다. 선조(宣祖)는 크게 기뻐하면서 사야가를 직접 만나 중용했다. 이제는 조선의 장수가 된 사야가도 전장(戰場)에서 히데요시의 충견들을 쥐 잡듯 때려잡았다. 사야가는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종2품 벼슬에 봉해졌으며, 권율(權慄) 등의 주청(奏請)에 따라 김씨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김충선은 조선인 포수(砲手) 양성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조선에서도 앞서 조총이 연구되고 있었지만 주력(主力)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에서 비로소 조총의 위력이 입증되자 조선조정은 대량생산에 착수코자 했다. 김충선은 자신의 집안 비법(祕法)대로 조총‧화약 제조술을 조선 장인(匠人)들에게 넘기는 한편 포수들을 조련했다. 사무라이답게 도법(刀法)에도 능했는지 일본도(日本刀)를 쓰는 기술도 전수했다고 한다.

 

진심이었던 김충선

 

김충선은 임진왜란‧정유재란(丁酉再亂) 종전(終戰) 후에도 진충보국(盡忠報國)해 자신을 받아준 나라의 은혜를 갚았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참전해 같은 항왜와 싸우기도 했다. 이괄에게 가담한 항왜들 중 서아지(徐牙之)라는 자는 칼부림에 뛰어나 도저히 대적할 이가 없었다. 이에 김충선은 서아지와의 담판에 나서서 그 잘못을 꾸짖은 뒤 목을 베었다.

 

가만히 앉아 목을 내준 듯한 서아지 태도가 이상할 수 있지만, ‘비겁한 기습’ 등을 수치로 여기는 사무라이 특유의 무사도(武士道) 문화를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이괄의 난은 기습 성격이 강했다. 비슷한 사례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켜 주군(主君)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뒤를 쳤다가 만인(萬人)의 공적(公敵)이 되다시피 했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있다. 조정은 이괄의 난 진압공로를 치하해 전답(田畓)을 내렸지만 김충선은 장졸들 먹일 둔전(屯田)으로 쓰라며 다시 나라에 반납했다.

 

김충선은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노구(老軀)를 이끌고 전선(戰線)으로 향했다. 쌍령(雙嶺)전투 등에서 그 막강한 청군(淸軍) 수백명을 베어 넘기는 전과(戰果)를 올렸으나 끝내 조정이 항복하자 통곡했다. 유교(儒敎)문화권 외곽 출신이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 때문인지 청나라도 이러한 김충선을 높이 평가했다. 김충선은 조선을 위해 무려 명(明)나라와 밀통(密通)했지만, 이를 적발한 청나라는 삼학사(三學士) 등과 달리 경고장만 내밀고선 용서했다고 한다.

 

벼슬길에서 떠난 김충선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정착했다. 이곳은 김충선을 시조(始祖)로 하는 사성(賜姓) 김해김씨 또는 우록(友鹿)김씨의 집성촌(集姓村)이 자리 잡았다. 지금도 김충선 후손 상당수는 이곳에서 살고 있다. 지난 2016년 10월 종친회장 김상보 씨가 일본 외무대신 표창을 받는 등 효유서로 조선인이 된 ‘사야가 김충선’은 한일(韓日)우호의 징검다리로서 오늘날에도 활약 중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김여정

 

10~11일 조선중앙통신 등을 통해 발표된 북한발(發) 담화에 국제사회가 일제히 주목한 내용이 담겼다.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북한 대외정책 총괄자인 노동당 부부장 김여정이 한국을 ‘남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호칭한 것이었다.

 

담화 내용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적대감으로 가득했다. 김여정은 미군 정찰기가 북한 경제수역 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하며 “깡패들은 주제넘게 놀지 말고 당장 입을 다물어야 한다” 등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군부(軍部)’ 등 용어를 누차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한미(韓美)’라는 표현도 썼다.

 

1991년 남북 동시 유엔회원국 가입과는 별개로, 우리는 북한을 ‘국가’가 아닌 반란세력이 점거한 우리 국토(國土)로 규정 중이다. 헌법 3조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島嶼)로 한다”고 못 박고 있다. 때문에 북한의 자칭 국호(國號)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또는 공화국) 대신 ‘대한민국의 북쪽’이라는 뜻에서 ‘북한(北韓)’으로 칭한다.

 

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듯 북한도 대한민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 사회주의헌법, 조선노동당 규약(강령) 등에는 ‘공화국 북반부’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당 규약 서문(序文)은 “당면(當面)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전국적’ 범위에서의 사회의 자주적‧민주적 발전 실현에 있다”고 명시 중이다. 2015년 5월 북한 대외선전용 출판물 제작사 ‘외국문출판사’의 ‘조선에 대한 리해(이해)’는 한나산(한라산)을 ‘조선의 명산(名山)’으로 소개했다.

 

따라서 북한도 대한민국 국호 그대로 부르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쪽’이라는 의미에서 ‘남조선(南朝鮮)’으로 지난 70여년 동안 호칭해왔다. ‘대한민국’ ‘한국’ 등을 입에 올린 북한주민들은 극형(極刑)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김여정이 마치 김충선처럼 ‘언중유골의 백기’라도 내걸듯 ‘조선반도 남반부’도 ‘한국’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물론 김여정의 단순실수, 통일의지 포기 강조, 김정은과의 협의 후 한미(韓美)에 대한 모종의 메시지 전달 의도 등 여러 경우의 수가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김여정이 김정일 시절부터 오빠 김정은과 보이지 않는 권력갈등을 겪어왔다는 설(說)은 무시할 수 없다.

 

미국 존스홉킨스(Johns Hopkins)대 연구원 등을 거쳐 아사히(朝日)신문 외교전문기자 겸 히로시마(廣島)대 객원교수로 재직 중인 마키노 요시히로(牧野愛博)는 올해 1월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를 서두르던 김정일에게 김여정은 ‘나도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존스홉킨스대는 미국 정보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그간 김여정은 김정은과 누차 충돌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해왔다. 한 때 김여정은 ‘로열패밀리’ 혈통이 무색하게 공식행사장 구석자리에 서거나 앉은 굴욕적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김일성의 오른팔’ ‘김정일의 스승’ 고(故)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1923~2010)가 1997년 남한으로 탈북했을 때도 (청와대와 정보당국 빼고) 그 누구도 이를 예상치 못했다.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로열패밀리 출신 고 이한영(본명 리일남‧1960~1997)씨의 1982년 남한 귀순도 마찬가지였다. 급변사태(Situation of sudden change)는 언제든 불시(不時)에 발생할 수 있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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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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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소유

    이 현대 사회에 고모부를 고사포로 처형하고 형을 테러로 숙청하는 놈인데

    김여정도 최근 권력 싸움에서 밀려 위기를 느껴 저런 발언을 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할 때만 남북 평화를 입에 올리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입니다.

    김정은이 건강문제로 급사라도 하지 않는 한 바뀌지 않을 것이고, 김일성이 죽었을 때도 이제 통일할 수 있다고 설레발 치던 언론을 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김정일 사망때도 한 번 더 속더니.

    그래서 전 설사 김정은이 죽더라고 김여정이 김충선처럼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대로 안보에 미리 대비하는 건 당연하다고 공감하는 바입니다.

  • 풀소유
    오주한
    작성자
    2023.07.11
    @풀소유 님에게 보내는 답글

    말씀하신 요지 적극 공감합니다. 공산권의 인간이하 추태는 더부러미친당이 실시간 생중계하고 있죠. 문xx에게 저도 직접 당할 뻔한 바 있습니다만..다시는 이땅이 저들의 놀이터가 안 되게 철통대비 또 대비해야 할 줄 압니다.

  • INDEX
    2023.07.12

    견고한 북한사회의 카르텔에서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살지 궁금합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7.13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자세히 공개하긴 그렇습니다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반대파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지난 잃어버린 5년 때 상당수 해를 입었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 오주한
    INDEX
    2023.07.13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7.13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_-)/ 조속히 매국집단을 엎어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