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2000년 전 염철회의가 산으로 간 까닭
염철론(鹽鐵論)은 기원전 81년 전한(前漢) 조정에서 벌어진 떠들썩한 토론회를 환관(桓寬)이란 사람이 기록한 책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실시한 염철 즉 소금‧철강 등 산업의 국가전매(專賣) 제도를 폐지할 것이냐 마냐가 논쟁의 주제였다.
무제는 정력적인 정복전쟁을 통해 흉노(匈奴)를 몰아내는 등 대제국을 건설했다. 성과는 준수했으나 그에 비례해 국고(國庫)는 급속도로 비어갔다. 이에 경제관료였던 상홍양(桑弘羊‧생몰연도 기원전 152~기원전 80)은 염철주(鹽鐵酒‧소금과 철강과 주류) 산업을 국가가 독점하자고 제안했고 무제는 승인했다.
한서(漢書) 등에 의하면 무제 사후(死後) 한소제(漢昭帝)가 전한 8대 황제에 등극하자 염철주전매제 존속여부를 두고 조정 내 대립이 벌어졌다. 폐지파는 이 제도가 국고 확충이나 민생안정에 별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상홍양 등은 당연히 존속을 촉구했다. 저마다가 자신이 옳다고 목소리 높이자 섭정(攝政) 곽광(霍光)은 전국의 학자‧관리들 의견을 수렴키로 했다. 각지의 사람들이 수도 장안(長安)으로 상경함에 따라 토론회는 성사됐다.
유가(儒家)는 “무릇 치국(治國)은 인의(仁義)에 기반해야 함으로 국가가 백성과 이익을 다퉈선 안 된다”며 제도 철폐를 역설했다. 염철주전매제는 백성 일자리를 뺏기에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반면 법가(法家)는 “전매제는 국고안정을 통한 여러 제도 시행을 통해 오히려 백성을 번창시킬 수 있다”고 맞섰다.
단 두 사람이 말싸움을 벌여도 결론 나기 쉽지 않은 법이다. 하물며 14주(州)에서 모인 장삼이사들이 목에 핏대 세우고 와글와글 의견을 개진하니 토론회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혀를 내두른 소제는 “다들 집에 가. 나가” 내쫓고서 상홍양과 승상(丞相) 전천추(田千秋)만 불러들였다. 이들은 “정확한 사정도 잘 모르면서 저들은 외람되이 철폐만 부르짖었습니다. 술 전매만 폐지하고 나머지는 지속하시지요” 간언했다. 소제는 이를 수용했다.
소제의 선택은 주효했다. 국가의 염철전매 특히 제염(製鹽)산업 독점은 무려 ‘2016년’까지 지속되며 역대 왕조를 먹여 살렸다. 역대 조정은 염철전매로 벌어들인 돈으로, 물론 폭정기간은 빼고, 염철전매로 조세부담이 크게 낮아진 백성을 배불렸다.
예를 들어 명(明)나라의 경우 전쟁은 곧 상당수 백성에게 특수(特需)였다. 명군(明軍)은 치중병(輜重兵)을 별도로 운용하면서까지 무거운 군량미를 직접 실어 나르는 대신 염철전매로 벌어들인 은자(銀子)로 주둔지 현지 곡식을 사다먹었다. 백성들로서는 전쟁으로 인해 수탈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셈이었다. 군납(軍納)만큼 좋은 사업도 없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참전한 명군도 마찬가지로 군자금을 지참했다. 만약 그 때 조선(朝鮮)에서 은자가 통화(通貨)로서 활발히 유통됐다면 조선 조야(朝野)는 전후(戰後) 재건자금을 적잖게 마련할 수 있었을 터였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규칙 개정 여부를 두고 찬반이 오간다. 일부는 당원투표 100%인 현행 룰을 고쳐 일반여론조사를 상당 비율 반영하자고 주장 중이다. 이 의견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지금의 여러 제반사정을 감안할 때 당원투표 비중을 높이는 게 옳지 않냐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 염철론의 선부지설(蟬不知雪)이라는 말처럼 어떤 무리의 속사정은 무리의 구성원들이 누구보다 잘 아는 법이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