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소나처럼 화살 꽂히는 맏형에게 힘을
소나(素那‧생몰연도 ?~서기 675)는 신라(新羅)의 장수다. 혈혈단신으로 당(唐)제국에 맞서 국토를 지킨 맹장이자 충신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소나는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지금의 충남 천안 직산) 사람으로 침나(沈那)의 아들로 태어났다. 침나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백성군을 칠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용명(勇名) 떨친 인물이었다. 백제가 멸망하자 소나는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 유공(儒公)의 추천으로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인 아달성(阿達城)에 배치됐다.
백제‧고구려가 잇달아 무너지자 당나라는 한반도 전역을 집어삼키려 획책했다. 그 결과가 670~676년의 나당전쟁(羅唐戰爭)이었다. 675년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에서 신라에게 크게 패한 당나라는 기세가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서 수시로 말갈(靺鞨) 용병들을 보내 신라 변경을 침범하게 했다.
문무왕(文武王) 15년인 675년, 아달성의 태수 한선(漢宣)이 성내 장정들을 이끌고 성 밖에 나가 삼을 심는 사이 수많은 말갈기병이 성을 습격했다. 성 안에는 힘없는 노약자뿐이었고 싸울만한 이는 소나 한 사람뿐이었다. 장검(長劍) 뽑아든 그는 “여기 침나의 아들 소나가 있다. 소나의 이름 모르는 자 앞으로 나서라!”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성난 맹수처럼 송곳니 드러내고서 칼 꼬나든 채 덤벼든 말갈족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쓰러졌다. 무려 진시(辰時‧오전 7~9시)부터 유시(酉時‧오후 5~7시)까지 싸움이 이어졌으나 말갈족의 시체만 쌓일 뿐이었다. 온 몸을 피로 물들인 소나가 호랑이 같은 눈매로 적진을 쏘아보자 그제야 침략자들은 두려움에 빠졌다.
말갈족은 접근하는 대신 활시위를 일제히 당겼다. 도주하는 대신 백성을 지키려 버티던 소나는 고슴도치마냥 온 몸에 화살이 박혀 전사(戰死)했다. 그의 아내는 눈물을 삼키며 “임께선 늘 ‘장부(丈夫)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 말(馬)가죽에 시신이 싸인 채 돌아와야 한다’ 말씀하셨다. 임께선 이제 그 소원을 이뤘다” 말했다.
소나의 이름은 조정에까지 흘러들어갔다. 크게 감동한 문무왕은 그를 경위(京位) 십칠관등(十七官等) 중 세 번째인 잡찬(迊飡)으로 추서(追敍)했다. 잡찬은 오직 진골(眞骨)만이 될 수 있었다. 진골은 왕족과 비(非)왕족 간 혼인으로 태어나는 계급이다.
보수정당 맏형뻘인 인사가 거대야당에 맞서 홀로 고군분투(孤軍奮鬪) 중이다. 야권에 의해 온 몸에 화살 꽂히고 있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관망만 하는 형국이다. 이대로 가다간 해당 인사가 소나처럼 장렬한 최후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고조된다. 당원‧보수층은 당(黨)과 나라를 지키려 분전역투(奮戰力鬪)하는 해당 인사에게 응당 힘을 실어줘야 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