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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초강세 ‘여덕’이 이끈다[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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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후대세
걸그룹 초강세 ‘여덕’이 이끈다
n.news.naver.com
아이돌 팬덤은 그간 ‘이성애적 낭만’으로만 해석되었다. 최근 걸그룹 흥행은 이 설명에서 벗어난다. 여성 팬들은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인 걸그룹을 동경하고 존중하며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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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5일 걸그룹 뉴진스(NewJeans) 멤버들이 팬들 앞을 지나며 인사하고 있다. ©<뮤직뱅크> 영상 갈무리


새벽 5시, 지소연씨(26)는 황급히 집을 나섰다. 걸그룹 뉴진스(NewJeans)의 팝업스토어가 개장하는 8월12일. 일찌감치 회사에 휴가를 내고 ‘오픈런’을 준비해왔다. 행사장에 도착해 주위를 살펴보니 대부분이 자신과 같은 여성 팬들이었다. 지씨는 새삼 오프라인 ‘덕질’ 풍경이 참 많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제가 네이버 팬카페를 만들 정도로 소녀시대를 좋아했어요. 그때부터 줄곧 걸그룹을 좋아해왔는데요. 10년 전만 해도 여성 팬들은 눈치가 보여서 이런 오프라인 행사장에 오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현장에서 ‘덕메(덕질 메이트)’도 사귈 수 있을 만큼 여성 팬이 많이 늘었죠.” 입장 예약을 해놓고 주위를 살피는 동안 처음 보는 뉴진스 팬들이 다가와 준비해온 간식과 스티커를 나누어주었다. 여성 팬들이 서로를 응원하는 문화였다.

요즘, 걸그룹이 초강세다. 하이브의 자회사인 ‘어도어’ 소속 걸그룹 뉴진스는 노출이나 현란한 퍼포먼스 없이 10대의 감정을 표현한 음악으로 ‘콘크리트 차트’라고 불리는 멜론 최상위 순위를 갈아치웠다. 뉴진스만의 독주가 아니다. 5년 만에 완전체로 컴백한 소녀시대부터 글로벌 팬덤을 이끄는 블랙핑크, 아이브, 있지 등 오직 걸그룹의 음악만으로 멜론 차트 1~10위가 채워지는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낯설어 보여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평가했다. 이미 음원 재생 횟수나 음반 판매량, 뮤직비디오 조회수 등을 통해 걸그룹의 흥행성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팬덤 지표라 불리는 음반 판매량 성적을 살펴보자. 과거에 수익을 남기는 음반시장은 보이그룹의 경쟁장으로 취급됐다. 충성도 높은 여성 팬들이 굿즈와 음반 판매, 콘서트 흥행을 책임지며 비즈니스 구조를 떠받쳐줬기 때문이다. 반면 걸그룹은 음원 차트에서만 반짝 인기를 끌다가 사라지곤 했다. 주된 수익은 방송 출연이나 행사였다. 하지만 최근 이런 공식이 깨지고 있다. 9월 발매 예정인 블랙핑크 정규 2집 〈본 핑크〉는 예약판매 일주일 만에 선주문량 150만 장을 넘어섰다. 지난 7월에 발매한 에스파의 〈걸스〉 앨범은 일주일 판매량(초동) 112만 장을 기록하며 걸그룹 초동 신기록을 세웠다. 8월22일 공개된 아이브의 세 번째 싱글앨범 〈애프터 라이크〉도 이틀 만에 앨범 판매량 60만 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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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어 제공

‘삼촌 팬’은 옛말, 구매자 다수가 여성



누가 걸그룹 앨범을 살까?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제공하는 앨범 구매자 분포 자료는 ‘삼촌 팬’이 옛말이라는 걸 보여준다. 8월24일 기준, 뉴진스 앨범 〈뉴진스(NewJeans) 블루북〉의 구매자 중 여성의 비율은 88.6%다. 8월22일 발매된 아이브의 〈애프터 라이크(After Like) 포토북〉도 앨범 구매자 중 여성 비율이 70.9%에 이른다. 소녀시대와 에스파의 신보 역시 60% 이상이 여성 구매자다.

‘걸그룹 여덕(‘여성’과 마니아란 뜻을 가진 ‘덕후’의 합성어, 이하 여덕)’은 어느 날 불쑥 등장한 존재가 아니다. ‘여덕’의 계보는 소녀시대, 원더걸스, 2NE1 등 2000년대 후반에 등장한 2세대 아이돌에서 시작된다. 이후 팬덤의 ‘화력’이자 적극적인 소비자로 적지 않은 여성 팬들이 걸그룹 팬덤의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아이돌과 팬의 관계를 ‘이성애적 낭만’이라는 공식으로만 해석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해왔다. 케이팝 아이돌이 전 세계 음악시장을 무대로 활동의 외연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아이돌들이 ‘대리 남자친구, 대리 여자친구’로만 소비되는 분위기는 점차 옅어졌다. 걸그룹 역시 어떤 성별의 팬에게든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음악에 담으며 성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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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소녀시대가 8월5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서울 코엑스 호텔에서 열린 소녀시대 데뷔 15주년 'FOREVER 1' 앨범 발매 기념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의 등장 역시 여성 팬덤이 확장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온라인 팬 활동의 구심점이 SNS로 이동하면서 팬클럽이라는 집단 문화는 약해지고 팬 개인의 가치관과 취향에 따른 ‘덕질’이 가능해졌다. 이런 ‘느슨하고 자발적인’ 팬덤 문화에 여성 팬들은 빠르게 적응하며 이를 자신들의 놀이로 향유했다.

이 시기에 걸그룹 여성 팬들은 그 어느 때보다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아이돌을 지켜나가기도 했다. 2018년, 이들은 연예기획사가 남성 아이돌 중심으로 투자하며 여성 아이돌을 차별해온 사례를 모아 ‘#SM_여돌차별_공론화’ 해시태그 운동을 주도했다.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 아이린의 사진을 불태우는 인증 사진을 올리자 적극적으로 이를 비판하며 싸웠다. 그러다 클럽 버닝썬 사건이 터졌다.

차우진 음악평론가는 걸그룹 여성 팬덤이 확장된 계기 중 하나로 ‘여성 팬들의 현타’를 짚었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팬덤 내에서도 여성 아이돌들이 겪는 부당한 처우가 공론화되던 시기다. 사회문제와 팬덤 문화의 내외부가 연동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했던 남성 아이돌들이 성범죄 가해자가 되어 뉴스에 나오니 실망을 넘어서 아예 등을 돌리게 되기도 했다. 여러 여성 팬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버닝썬 사건, 여성혐오 가사 논란 등으로 남성 아이돌을 좋아할 수 없다고 느끼던 차에 멋진 걸그룹들을 알게 되고 팬이 됐다는 응답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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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아이브가 8월14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도이체 방크 파르크에서 열린 'KPOP FLEX'에서 공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진씨(34)는 걸그룹 ‘이달의 소녀’의 국내 콘서트에 모두 참석한 ‘열성 여덕’이다. 걸그룹을 왜 좋아하느냐고 묻자 그는 멤버들 간의, 멤버들과 팬들 간의 ‘관계’를 짚었다. “시스터후드(여성 연대감) 같은 걸 느끼게 되더라고요. 걸그룹 멤버들 간에는 서로 도와주고, 끌어주고, 보듬어주는 관계성이 있어요. 또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으로서 우리가 겪는 고충들을 여자 아이돌도 겪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거든요. 어리게 취급당하거나 무해하게 행동하길 바란다거나.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는데, 그런데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더 아끼게 되더라고요.” 요즘 걸그룹의 변화를 묻자, 그는 ‘신발’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 힐을 많이 신었는데 지금은 정말 많이 사라졌어요. 예쁘거나 섹시하게 보이기보다 퍼포먼스에 집중하기 위한 변화라고 생각돼서 좋아요.”

많은 여성 팬들은 걸그룹을 보며 ‘닮고 싶다’고 말한다. 한때 이 말은 ‘저렇게 예뻐지고 싶다’는 뜻으로만 해석됐다. 하지만 여성 팬들은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이자 직업인인 ‘걸그룹’을 동경하고 존중했다. 여성 팬들은 ‘여자 아이돌’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 기꺼이 여돌(여성 아이돌)과 사랑에 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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