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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감히 ‘테스형’에 열광해?

서포터즈11

 

 

 

2020년 추석, 트로트 가수 ‘가황(歌皇)’ 나훈아의 비(非)접촉 콘서트가 방영되었다. 19년부터 시작되어 2020년 내내 대한민국에 불었던 소위 ‘트로트 열풍’은, 말 그대로 ‘황제’의 등장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장년층이 열광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크고 작은 구설수로 인해 나훈아를 ‘가수’보다는 ‘5분’이라는 키워드로 더 많이 접해본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의 공연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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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전부터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엔 나훈아 콘서트와 관련된 도시전설이 떠다니곤 했다. 아이돌 콘서트에 견줄 정도로 피 튀기는 예매 경쟁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공연 스케일 등에 대한 ‘간증’ 후기 글이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암암리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긴 말 필요없이, 시청률 29.0%, 순간 시청률 41.44%, 순간 점유율 71%라는 수치는 그러한 전설이 사실 자전적 수필이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모든 매스컴과 인터넷 커뮤니티는 나훈아 콘서트에 관한 이야기들로 도배되었고, 갖가지 블랙유머와 2차 창작물들 역시 양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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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중 가장 화제가 된 곡은 누가 뭐라해도 공연 종반부의 ‘테스형!’이었다. 무대 자체의 웅장한 스케일이나 장르와 세대를 관통하는 듯한 기타 퍼포먼스 등을 차치하고, ‘테스형!’이라는 가사 그 자체가 주는 위트와 신선한 이질감은, 나훈아라는 인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마저 ‘동네 형’으로 느껴지게끔 만들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국민들은 열광했다. 갸우뚱하게도.

 

 

 

소크라테스가 누구인가? 플라톤의 스승이자, 3단연역논증의 끝없는 희생자, 못생겼던 것으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철학자, ‘무지(無知)의 지(知)’와 “너 자신을 알라”로 대변되는 산파법의 아버지,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 남자,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들 중 한 명인 바로 그 사람. 그리고 놀랍게도, ‘그토록 정의롭고 고결한’ 민주주의를 극렬히 반대한 귀족적 선민사상가.

‘중우정치(衆愚政治, ochlocracy)’라는 개념이 있다. 직역하면 ‘어리석은 무리의 정치’라는 뜻이며, 흔히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쉬이 선동된 군중이 다수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사용되곤 하는 개념이다. 유사한 인터넷 속어로는 ‘국개론’이 있는데, 이는 ‘국민 개X끼 론’의 준말로 중우정치의 보다 과격한 표현이라 볼 수 있겠다.

 

2020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의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이 출소했다. 국민 여론 등을 고려하여 조두순의 출소 장소가 공식적으로 공개되진 않았으나, 출소 당일 조두순의 출소지인 서울남부교도소와 그가 자택 귀가 전 거쳐가는 안산보호관찰소, 그리고 조두순의 자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법무부는 돌발 상황 방지 등을 근거로 관용차량을 동원하여 조두순의 서울남부교도소부터 자택까지의 모든 출소절차를 보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흥분한 시민들에 의해 관용차가 파손되거나 도로 정체 현상이 일어나는 등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후 일부 시민들은 조두순 자택의 가스 밸브를 잠그거나, 공무 중인 경찰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으며, 이듬해 4월에는 조두순 부부가 모 마트에서 발견되었다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와 기사까지 작성되었으나 사실이 아니었고, 이어 7월엔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 ‘조두순이 파주의 한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것 같다’며 청약 당첨자의 신상정보가 병기된 글이 올라왔으나 이 역시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이후 12월 16일 저녁, 같은 해 2월 칼을 들고 조두순의 집에 침입을 시도하다 체포되었던 남성이 경찰을 사칭하여 조두순의 집에 들어가 그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필요로 하며, 동시에 외치고자 하는 것은 과연 ‘정의(正義)’인가?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은 법치국가의 당위적인 스탠스이다. 헌데 우리의 법은 왜 범죄자에게 세금을 들이는가? 왜 우리의 법은 폭행범을 폭행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법은 강간범을 강간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법은 살인범을 살해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법은 눈을 뽑은 사람의 눈을 대신 뽑아내지 않는가?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기관의 이름이 ‘형무소(刑務所)’가 아니라 ‘교도소(矯導所)’인 이유는, 근현〮대 법철학의 보다 발전된 이해에서 출발한다. 해석마다의 차이는 일부 있을 수 있으나,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가 그 사회 속에서 이로움을 영위하기 위해 암묵적 계약을 맺었으며, 그 계약으로 말미암아 사회로 하여금 사회 전반에 위협이 되는 것에 반하는 힘을 갖게 한다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뼈대가 된 사회계약론의 대의명분이다.

다시 말해, ‘처벌’은 ‘복수’가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처벌’은 ‘행동 교정(behavior modification)’으로서, 바리사이인의 돌팔매가 아니라 사실 강형욱의 간식과 그 온도가 더 닮아 있다. 우리는 보다 사고할 수 있고 숙고할 수 있게 되었기에, 사건을 마주하면 경과를 찾고자 하고, 결과를 보면 원인을 찾고자 한다. 우리는 전체주의자도, 운명론자도, 결정론자도, 맹목적 원리주의자도 아니게 되었기에,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는 패배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노력하며 교정한다. 또한 당연하게도, 우리의 ‘계약’에 의해, 이 교정사의 따뜻함은 만인을 평등하게 포용해야 한다. 본디 과정은 중요하고 결과는 필요한 것이다. 과정만을 필요로 하는 집단은 성과를 낼 수 없으며,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집단은 발전할 수 없다.

 

단, 이 교정에 동반되는 단 하나의 차디찬 철칙은, 바로 그 주체의 ‘단일성과 독립성’의 보장이다. 다시 말해, 강형욱 말고는 그 누구도 목줄과 간식을 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방구석 전문가’들이 서로 내가 옳다며 ‘검증되지 않은 자신만의 이론’을 들어 돌팔매든 먹이든 던지게 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토록 열광해 마지않았던 ‘테스형’이,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δ νεξέταστος βίος ο βιωτὸς νθρώπ)” 하시지 않나.

 

 

 

어디가 시발점이었을까. ‘누군가’의 탄생이, 이성이 아닌 촛불에 뿌리를 두었을 때일까, 아니면 ‘신문고’가 ‘대자보’가 되어버렸을 때일까. 무엇이 이들을 검토 없는 아우성만 내뱉게 만들었을까. ‘소통의 장’이 되겠다던 광장이 닫혔을 때일까, 오겠다던 집무실, 아니 님께서 오지 않기로 하셨을 때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이, 펼쳐질 세상에 대한 발돋움이 아닌 벌어진 과거에 대한 분노와 복수로 나기 시작했을 때일까.

대토론회가 열렸던 광장은 독재정치의 이웃나라에 의해 무너져 내렸고, 대토론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광장엔 결국 ‘테스형’과 민주주의가 아닌 단두대와 장작더미가 놓였다. 다만 애석한 것은, 백만 년이 넘는 길고 긴 불의 역사동안, 마녀를 태우는데 성공한 불은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렇게나 사랑하면서 그들은 ‘테스형’에 열광했다. 갸우뚱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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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꿈 크루 서포터즈 1기

칼럼(법)팀 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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