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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심을 얻고도 천심을 얻지 못한 사람들

서포터즈1

1. 민심을 얻고도 천심을 얻지 못한 사람

지난달 29SBS 윤춘호 논설위원의 홍준표 의원의 인터뷰를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민심을 얻고도 천심을 얻지 못한 사람글의 시작을 여는 대목이었다.

 

그 중 홍의원님의 답변 중에 마음을 울리는 글이 있었다. “외롭다기보다 가슴이 좀 공허하지. 민심을 얻고 당심에서 참패를 하니까 이게 거꾸로 된 거 아이가. 당심을 얻고 민심에서 졌다면 수긍이 되는데 26년간 헌신한 이 당에서 내침을 당하니까. 민심에서 압승하고 당심에서 져서 본선에 못 나가니 허망하지. 요즘 뭐 그렇지.”

(참조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622882&plink=ORI&cooper=NAVER)  

 

그렇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하늘 문이라고 말을 하였다. 아쉬운 일이지만 하늘에 맡긴 홍준표 의원의 말에 수긍이 되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2. 소현세자의 이야

조선시대에도 단순히 혈육이란 이유로 왕이 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도 있었다. 그 중 오늘은 소현세자(昭顯世子)에 대해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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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후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벌어진 후 인조는 광해군의 뒤를 이어 조선의 16 왕이 되었다. 그 중 오늘 말하고자 하는 소현세자는 인조의 첫째 아들이었다.

 

당시 외교적 상황은 명나라가 기울고 청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잡을 때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데 청나라에 반대했던 인조와 세력들이 집권을 하고 있었기에 병자년에 청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삼전도의 굴욕과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런데 위기는 곧 기회라 했던가. 소현세자의 능력은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지금의 선양)으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심양관이라는 작은 거처만 주어졌을 뿐 한 나라의 세자의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소현세자는 기지를 발휘하는데 거기 있는 땅을 개간을 해서 농작을 하였고 상거래를 통해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이윤을 남긴 돈으로 청의 포로로 붙잡혀 온 조선인을 돈을 주고 사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덕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외교적인 감각이 탁월했는데 당시 청나라의 고관들과 접촉하여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넓혀갔고 특히 동갑이었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훗날 예친왕이 된 인물)과 접촉을 하며 친분을 쌓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농업과 외교에 그치지 않았던 소현세자의 비전(Vision)은 날로 더 커져만 가게 되는데 이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바로 서양의 신문물들이었다. 지구본, 천문도, 흠천감과 같은 신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1644년 청은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까지 입성하게 된다. 청과 함께 소현세자도 북경에 입성하게 되었고 당시 북경에는 서양 선교사가 많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담 샬이라는 독일인 선교사이다. 중국 천주교의 역사를 정리한 정교봉포에 따르면 순치 원년(1644) 조선국왕 이종(인조)의 세자가 북경에 인질로 와서 아담 샬의 명성을 듣고 자주 천주당에 왔다소현세자가 접한 서양의 신문물 중 가장 감동이 된 것은 천주학이었다.

 

소현세자는 당시 배운 것을 조선에 가져와 조선의 부흥을 기대하며 하루하루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지만 소현세자가 조선의 왕으로 즉위를 하게 되었다면 조선은 보다 더 빨리 서양의 문물들을 접할 수 있었고 신문물들과 함께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을 해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가장 큰 역경과 고난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9년이란 볼모 생활 끝에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청에서 꿈꾸었던 자신의 비전(Vision)을 조선 땅에 펼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청에서 가져온 신문물들과 특히 천주학을 인조에게 보이게 되었을 때 인조와 성리학을 통하여 명나라를 주인으로 생각하던 사대부들은 소현세자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야사를 보면 소현세자가 청의 선물로 받아온 벼루를 인조에게 보였을 때 당시 청나라에게 치욕적인 굴욕을 당했던 인조는 벼루를 소현세자에게 던지게 되었다.

 

타국에서 서러움을 이겨냈던 소현세자는 조선에 귀국한지 고작 2개월 만에 본향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아버지 인조가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설이 많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 청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소현세자가 자신을 없애고 왕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을 것이라 말을 한다. 그리고 인조와 함께하던 서인은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아 결단코 소현세자가 왕이 되는 모습을 순수히 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3. 오늘날 대한민국  

소현세자가 돌아가신지 377년이 자났다. 오늘날은 얼마나 변했을까? 나라와 조직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예전과 달리 대우를 받고 있을까? 민심이 천심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기득권이라 불리는 자들은 나라와 조직의 번영을 위하고 있는가 자신의 안위를 위하고 있는가?

 

끝으로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이란 시의 일부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 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청년의꿈 크루 1기 서포터즈 경제담당_권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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