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살신성인 개혁 주역들 재활약 기대해본다
오기(吳起‧생몰연도 ?~기원전 381)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풍미한 병법가다. 인간적 평가는 다소 엇갈리긴 허나 수십만 병력이 동원된 큰 전투를 76차례 치르면서 64승 12무 0패를 기록한 명장(名將)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오기가 저술한 오자병법(吳子兵法)은 손자병법(孫子兵法)과 함께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양대 병서(兵書)이기도 하다. 일본 전국시대 무장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신조로 삼은 풍림화산(風林火山)이 손자병법에 있다면 오자병법에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가 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이 말은 이순신(李純信) 장군이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오기가 목숨으로 개혁에 앞장섰던 희대의 정치가이기도 했다는 점은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다.
사기(史記) 손오열전(孫吳列傳), 한비자(韓非子) 등에 의하면 오기는 당초 병가(兵家)가 아닌 유가(儒家)의 사람이었다. 젊어서 그는 증자(曾子)의 제자가 돼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우연한 계기에 병학(兵學)까지 통달하게 된 오기는 위(魏)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위문후(魏文侯)와 오기의 문답을 담은 게 오자병법이다. 위나라의 장수가 된 오기는 자신의 전쟁 철학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는 늘 사졸(士卒)들과 똑같이 입고 먹고 마셨다. 잠 들 때도 자리를 깔지 않았고 행군 때는 걸었으며 자신의 식량은 자신이 짊어졌다.
하루는 한 어린 병사가 종기가 나자 직접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기도 했다. 고향에서 이 소식을 접한 병사의 어머니는 “그 아이 아버지도 오 장군께 감동해 죽기로 싸우다 전사(戰死)했는데 이제 아들마저 잃게 됐다” 통곡했다. 여기에서 비롯된 고사가 연저지인(吮疽之仁)이다. 병사들은 진심으로 충성하며 오기를 따랐다. 이는 64승 12무 0패 신화의 원동력이 됐다.
오기는 임금에 대한 충언(忠言)도 아끼지 않았다. 문후 사망 뒤 즉위한 위무후(魏武侯)는 오기와 함께 서하(西河) 지역 시찰에 나섰다. 험준한 산세를 본 무후는 “나라의 보배로다” 기뻐했다. 이에 오기는 “예로부터 많은 군주가 견고한 지형만 믿다가 패망했습니다. 나라의 진실된 보배는 바로 임금의 덕입니다” 직언했다. 무후는 크게 감탄하며 고개 끄덕였다.
위나라에서의 개혁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명재상 전문(田文)이 숨지고 새로이 재상에 임명된 부마(駙馬‧임금의 사위) 공숙(公叔)은 오기를 매우 시기‧질투했다.
간계(奸計)를 짜낸 공숙은 무후 앞에서 짐짓 오기를 칭찬하며 “그에게 공주를 시집보내면 더욱 주공께 충성할 것입니다” 건의했다. 그리고는 오기를 자기 집에 초대해 자신의 아내 즉 무후의 딸이 자신에게 ‘갑질’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 꼴은 본 오기는 ‘무후 집안 딸내미들은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아는구나’ ‘땅콩회항이 생각나는구나’ 기겁하고서 “내 사위가 돼라”는 무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무후의 신임을 잃은 오기는 초(楚)나라에 초빙돼 재상이 됐다. 이곳에서 오기는 두 번의 실수는 없다는 듯 전력을 다해 개혁에 나섰다. 초도왕(楚悼王)을 알현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습니다. 결국엔 (계파를 꾸려) 위로는 임금을 우습게 알게 되고 아래로는 (백성의 땅을 빼앗아) 백성이 굶주리게 됩니다. 이는 나라살림을 기울게 하고 오합지졸(烏合之卒)을 양산합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관직들을 모조리 철폐하십시오. 또 왕실과 촌수가 먼 집안 재벌3세로서 밥만 축내는 이들의 작록(爵祿)을 거두십시오. 이렇게 마련된 예산으로 강군(强軍)을 양성하고 백성을 먹이십시오”
도왕이 윤허하자 오기는 “네놈을 살려두긴 쌀이 아까워!” 외치며 이 어마어마한 개혁에 착수했다. 임금의 사돈의 팔촌이라는 이유만으로 떵떵거리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쌀벌레로 지목돼 억대 연봉 지급이 끊겼다. 여러 세족들도 졸지에 벼슬 잃고 궁궐 밖으로 내쫓겼다. 이들에겐 대신 불모지로 차출돼 개척하는 일, 쉽게 말해 ‘노가다’ 업무가 주어졌다.
반면 백성들은 농사지을 제 땅이 생겼다는 기쁨에 눈물 흘렸다. 병사들은 저마다 근육질 자랑하며 헐크 호건으로 변모해갔다. 오기는 쌀벌레들로부터 거둬들인 예산 및 백성이 낸 세금으로 치중(輜重)을 확보했다. 그리곤 사나운 사졸들과 함께 진(陳)‧채(蔡) 두 나라를 병합하고 북쪽의 삼진(三晉), 서쪽의 진(秦)나라를 격퇴했다. 이렇듯 오기의 개혁이 엄청난 선순환 효과를 야기하자 초나라 국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오기는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해 ‘죽음’으로써 개혁을 완수했다.
기원전 381년 도왕이 승하(昇遐)하자 그간 벼르고 별렀던 쌀벌레들은 난을 일으켰다. 거지꼴 된 쌀벌레들이 옆구리 주름잡으며 몰려온 그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기는 군사 이끌고 맞서는 대신 궁지에 몰렸다. 그러자 오기는 안치된 도왕의 시신 위에 엎드렸다. 쌀벌레들은 일제히 화살을 난사(亂射)했고 일세(一世)의 영웅 오기는 그렇게 전설이 됐다.
쌀벌레들은 통쾌하다는 듯 낄낄거리며 꾸물꾸물 나뒹굴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었다. 당시 초나라 국법(國法)은 임금의 살아생전 옥체(玉體)는 물론 그 시신마저도 훼손하는 걸 엄격히 금지했다. 앞선 춘추시대(春秋時代) 인물인 오자서(伍子胥)가 초평왕(楚平王)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가루가 되도록 채찍으로 두드려 팬 사건 여파로 생긴 법이었다.
도왕에 이어 즉위한 초숙왕(楚肅王)은 “저 발칙한 해충들 몽땅 잡아들여라” 엄명했다. 만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꼬질꼬질한 쌀벌레들 목은 차례차례 떨어졌다. 이 해수구제(害獸驅除) 사업으로 멸족(滅族)된 해충 집안은 70여 곳이나 됐다.
덕분에 오기의 개혁 효과는 오래오래 지속됐다. 초나라는 훗날 춘추전국시대 말기까지 살아남아 진나라와 자웅(雌雄)을 겨루게 된다. 초나라는 진시황(秦始皇)이 발탁한 대장 이신(李信)의 수십만 대군을 패퇴시킬 정도로 강력한 진나라와 건곤일척(乾坤一擲) 승부를 벌였다. 이변이 없다면 천하를 차지하는 건 초나라가 될 거라는 전망이 당대에 파다했다.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오기가 초나라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 일부러 자신을 희생했을 것” 추측했다.
오늘(14일)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가 1차 단수추천 명단을 발표했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서울 동작을), 오신환 전 의원(서울 광진을) 등이 포함됐다고 한다. 두 사람을 비롯해 상당수 단수추천 인사들은 마치 2천수백년 전 오기처럼 그간 당의 쇄신‧개혁을 위해 몸 던져온 이들이다.
물론 앞으로 두고 보긴 해야겠지만 이들이 국회 재입성 시 어떠한 개혁안들을 또다시 들고 나올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들에 대한 단수공천을 크게 환영하는 바이다. 총선에서의 선전(善戰), 그리고 많은 당원‧국민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행보를 기원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나경원이면 어느정도 이해는 가능한데 오신환은 진짜 아닌거 같습니다. 오신환 지역구에서 한게 없는 거 같은데 말이죠.